조선의 시간을 품은 순교의 성지, 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자리한 해미읍성은 단지 오래된 성곽이 아니다. 600여 년 동안 전쟁의 방패가 되었고, 신념의 피가 스며든 성벽은 오늘날까지 말없이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해미읍성은 조선의 방어시설로 시작해 순교자들의 처형장이 되었으며, 지금은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2025년 4월 23일, 기자는 재학 중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도시콘텐츠관광학과 학생들의 문화탐방에 함께 다녀왔다.

해미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현재에도 원형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읍성이다. ‘해미(海美)’는 1407년(태종 7),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 부르게 된 지명이다. 사진=우성윤

해미읍성은 일반적인 행정 기능의 ‘읍성(邑城)’이 아닌,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兵營城)이었다. 충청병영은 원래 덕산에 있었으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해안과 가까운 해미로 이전됐다.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 사이에 축성됐으며, 1652년(효종 3) 충청병영이 청주로 이전되기까지 230여 년간 충청 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중요한 성이었다.

병영이 청주로 이전된 이후에도 해미는 서해안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충청도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이 설치됐다. 또한 해미현을 병영으로 옮겨, 현감과 영장을 겸임하는 겸영장제(兼營將制)를 실시하여 1914년까지 호서좌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지성루(枳城樓). 해미읍성의 서문. ‘지성루’라는 이름은 ‘탱자나무 성루’라는 뜻으로, 과거 해미읍성 주변에 탱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적의 접근을 막는 방어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데에서 유래됐다. 1974년에 복원됐으며 성문 아래의 홍예문 좌우 성돌은 원래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우성윤
해미읍성은 성 둘레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탱자나무에 피는 하얀 꽃이 특히 아름답다. 사진=우성윤

조선의 군사 성곽에서 피의 성지로

조선 후기, 천주교가 유교적 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며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됐다. 해미는 충청도 지역 박해의 거점으로,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당시 수많은 신자가 이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

해미읍성 안에 있던 형방청과 옥사에서는 이보현(요셉), 이존창(루도비코), 윤지헌(프란치스코) 등 신앙 지도자들이 끝까지 신념을 지키며 생을 마감했다. 일부는 참수형에, 대부분은 교살(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천주교 신자들의 손발과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던 회화나무. 지역에서는 ‘호야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에는 철사를 맨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진=우성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600년의 세월을 품은 해미읍성은 조선의 국방 요새였고, 신앙을 지키다 피 흘린 순교자들의 땅이었다. 오늘날 이곳은 세계 천주교인의 발길이 이어지는 국제 성지로 다시 태어났다.

순교자의 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걸음, 세계 신앙의 성지가 된 서산 해미읍성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했다. 당시 교황은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주례하기 위해 방한했으며, 해미읍성에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을 직접 기리며 “이들은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이뤘다”고 추모했다.

이날 해미읍성에서 열린 폐막 미사에는 전 세계 6000여 명의 천주교 청년과 국내외 성직자들이 함께했으며, 교황은 순교자기념관을 참배하고 회화나무 앞에서 침묵의 기도를 올렸다. 이 방문은 해미읍성을 전 세계 천주교의 이목 속에 올려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세계 성지로 선포된 해미

이듬해인 2015년, 바티칸은 해미읍성을 공식 ‘천주교 성지’로 지정했고, 한국 천주교회 역시 이곳을 ‘성지순례의 핵심 거점’으로 정비했다. 순교자들의 마지막 길인 ‘순교자의 길’, 기도 공간, 성체조배소, 해미순교자기념관 등이 조성되며, 이곳은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그 교황 프란치스코는 2025년 4월 21일, 부활절 다음 날인 월요일 오전 7시 35분(현지 시각) 바티칸의 도무스 산타 마르타(Domus Sanctae Marthae)에서 향년 88세로 선종했다. 교황의 선종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더욱 큰 애도와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 순례길 표지판. 사진=우성윤
서산 해미읍성 리플렛 캡쳐

문화재 지정과 복원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군현제가 폐지되면서 해미현은 서산군에 통합되었고, 이에 따라 해미읍성도 폐지됐다. 폐지 이후 관아 건물은 면사무소로, 객사는 학교로 사용되었으며, 청허정은 신사(神社)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1963년 1월 21일, 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지정됐다.

해미읍성의 총 길이는 1800m, 성벽 높이는 약 5m이며, 성벽 외곽에는 깊이 2m의 해자가 파였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이 산에 쌓은 산성이라면, 진주성, 공산성, 사비성은 강을 낀 산에 지어진 성이다. 반면 해미읍성은 평지에 타원형으로 축조된 것이 특징으로, 전체적인 형태가 달걀 모양과 비슷하다.

1970년대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성내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동헌, 객사, 내아 등을 복원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성내 건물의 정비 작업이 이어졌다.

넓은 잔디 위 포토죤. 사진=우성윤

기억과 문화가 함께하는 공간,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

해미읍성은 단지 종교적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 2004년부터 매년 가을 열리는 해미읍성축제는 조선 시대 병영문화와 순교자 정신을 함께 기리는 서산시의 대표 문화행사다. 병사복 재현, 성곽 미디어아트, 성벽을 따라 펼쳐지는 야간 공연까지,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지는 축제가 펼쳐진다.

서산시 관계자는 “해미읍성은 군사·종교·문화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역사 공간이다. 앞으로도 세계가 주목하는 신앙과 평화의 성지로서 더욱 자리매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해미읍성은 지금도 묵묵히 순례객을 맞이한다. 돌담과 나무 한 그루, 그늘 아래 머무는 바람마저 조용한 기도를 닮았다. 그곳에는 조선의 용기, 믿음의 흔적, 그리고 교황의 발걸음이 함께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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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윤 기자
우성윤 기자
현재 고양시니어신문 기자, 숲해설가와 문화해설가(궁궐해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은행에서 30년 근무 했고, 전쟁기념관 도슨트, 성남문화해설사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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