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씨녀’는 중국 소주(蘇州) 지방의 양인 출신이다. 명나라 말기 관리들이 약자에 대한 약탈과 부녀자에 대한 간음을 일삼았다. 굴씨녀의 어머니는 이런 상황 속에서 몸이 더럽혀지느니 차라리 죽음의 길을 택하여 딸과 더불어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굴씨녀의 어머니는 죽고 굴씨녀만 살아남게 되었다. 한 관리가 굴씨녀를 발견해 궁궐로 데려가 명나라 마지막 16대 황제 숭정제의 주황후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와 품행으로 사랑을 독차지했다.
농민반란군 이자성이 자금성을 점령하자 명나라의 황제와 황후는 자결한다. 그녀도 함께 죽으려 했지만 황후가 말려 궁궐에서 도망쳐 민간에 숨어 지냈다. 이후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청나라 궁궐로 보내졌다.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도르곤이 굴씨의 미모에 반하여 첩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굴씨는 거부했다. 이후 그녀는 인질로 온 소현세자에게 보내졌다.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부 아담샬을 만나 천주교를 이해하게 되고 사실상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담샬은 세자가 8년간의 불모에서 풀려 환국할 때 청나라 황실에 부탁하여 조선의 포교를 위해 세례를 받은 환관과 궁녀를 딸려 보내도록 했다.
이때 소현세자를 봉행한 사람이 환관 이방조,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두문방 5명이고, 궁녀는 굴저와 최회저, 유저, 긴저 4명이다. 그중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가 바로 굴저(屈姐) 굴씨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셨으며 소현세자를 따라 향교방에 있었다.
소현세자는 불행하게도 환국한 지 2개월 만에 죽게 된다. 이에 따라 청나라 당국은 배종했던 사람들에 대한 환국령이 내렸지만, 굴씨녀는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조선에 살기를 원하여 여승이 된 뒤 자수원에서 지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효종은 굴씨녀로 하여금 명나라 황실의 법통, 예절을 시범케하고 궁인들에게 본 받게 하였다. 송시열은 이 굴씨녀의 시범을 본으로 전국이 통일하도록 하자고 주청하기도 하였으니, 조선조 중기 이후 궁중법도 및 예절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굴씨녀였다고 한다. 굴씨는 조선 궁인들에게 자수와 중국어를 가르쳤고,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을 평생 보살피며 여생을 보냈다. 비파 연주를 잘 하였고 새와 짐승을 기르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향수와 신흥 청나라에 대한 경멸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굴씨녀를 통해 여러가지 작품을 남겼다.
선비 신진유는 ‘굴씨사’를 남겼고, 시인 신위는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를, 선비 김구는 ‘굴씨 묘를 지나며’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당대에 빼어난 시인인 신위의 시는 굴씨의 비파 솜씨를 가늠케 한다.
-비파를 타는 여인-
장렬왕후 궁녀 가운데 제일로 꼽혀 / 만수전 봄빛에 활짝 피었네
터져 나오는 소리는 은혜와 원한의 긴 여운 / 바람모래 부는데 비파 소리가 전각을 감도네
신령스런 솜씨, 옛 명인들을 감복시키고 / 눈물에 고인 눈, 함께 온 고국 사람 바라보네
비파를 안고 무릎에 높은 채 몸에서 떼지 않았으니 / 미인은 흙이 되어도 악기에 밴 향기가 남았네.
시인 신위(申緯, 1769-1845)의 시, 숭정궁인굴씨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
풀잎은 비단치마 꽃잎은 비녀 / 언덕벼랑에 옥을 묻은 지 몇 년 지났나
해마다 한식 청명절에는 / 오직 궁녀가 있어 종이돈을 보내네
김구라는 사람이 굴씨녀 묘를 지나며 ‘굴씨과묘시(屈氏過墓詩)’를 지었다.
굴씨는 나이 70세에 죽었다. 그녀는 늘 중국 쪽을 바라보며 황후의 은덕에 감사했고, 청나라와 여진족을 얘기할 때마다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죽어서라도 효종의 북벌(北伐) 군대를 보고 싶다면서 서울의 서쪽 교외 중국으로 가는 길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굴씨의 묘가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이다.
이 대자골 굴씨녀에 대해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왕실의 궁녀들이 이 무덤을 찾아 성묘하고는 지전(紙錢)을 놓고 감에 따라 주변에는 지전이 바람에 날렸다고 한다. 그리고 19대 숙종임금 때는 명나라에서 귀화한 전회일에게 세비를 주어 굴씨녀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서도(西道-중국을 가는 길)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풀이 나지 않는 홍분(紅墳)이 두 개 있는데 오른쪽은 여말의 충신 최영장군 무덤이고, 왼쪽은 굴씨녀의 묘이니 억울함을 풀지 못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근엔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경안군 이회와 증손자 밀풍군의 묘가 있다.
간촌마을에 원래 굴씨의 묘비가 있었으나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묘비도 사라졌다고 한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2001년 4월 소현세자 종중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다시 세웠다.
[우성윤 기자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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