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동누리길에는 고려 후기 무신 최 영 장군의 묘가 있다. 최 영 장군은 위화도 회군으로 실각하고 참형을 당한 뒤 이곳에 묻혔다. 오랫동안 봉분 위에 풀이 돋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렸다. 1976년의 사초(莎草) 이후부터 풀이 돋아 현재는 무성하다. 묘역 주변에 큰 소나무가 많이 식재돼 햇빛을 받지 못해 풀이 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최 영 장군 묘는 쌍분으로 돼 있다. 윗묘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이며, 아랫묘가 최 영 장군 묘다. 아내 문화 류씨와 합장됐다. 왼쪽에 후손이 세운 묘비가 있고 오른쪽에 충혼비가 있다.
최 영 장군은 동주(東州)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1년(1352)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이다. 특히, 공민왕 5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지역을 공격해 되찾았다. 또한 요동정벌을 단행해 팔도통도사로서 전쟁을 지휘했으나 출병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막지 못하고 이성계에 의해 체포돼 유배됐다. 이후 1388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돼 아버지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됐다.
최 영은 충신이자 명장이면서도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 공직자들에게 귀감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해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했다.
최영장군묘 주변에는 고양동누리길을 따라 필리핀참전비,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 벽재관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