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녕대군 휘는 종(褈)이다. 조선왕조 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7명의 왕자 중 생존한 4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로서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의 친동생이다.
성녕대군의 동복형들은 모두 아버지가 왕이 되기 전 잠저에서 태어났으나 이종(李褈)은 아버지가 왕이 된 후에 태어났는데, 태종과 원경왕후가 40세 가까운 나이에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행동거지가 공손했으므로 태종과 원경왕후가 총애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8세이던 1414년(태종 14년) 1월 13일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해졌으며 그해 12월 창녕 성씨 좌찬성 성억의 딸과 결혼했다. 이때 부인 성씨는 경녕옹주(敬寧翁主)에 봉해졌다. 왕 자녀들은 결혼하면 궁 밖으로 나가서 사는 법도를 깨고 결혼한 뒤에도 궁 안에서 지냈다. 원래 몸이 약했던 탓도 있고, 태종 내외가 너무 나도 사랑하는 막내아들이라 궁궐 밖에 살 저택을 마련해 뒀음에도 일부러 출궁시키지 않고 곁에 둔 듯하다.
1418년(태종 18년) 1월 26일 성녕대군이 완두창(홍역)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태종은 국사를 며칠 간 돌보지 않았다.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며 흥덕사에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만 12세 7개월의 나이로 성녕대군은 요절하고 만다.
성녕대군은 고양현 북쪽 산리동 산기슭에 안장됐다. 묘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어려서 사망해 후사가 없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성녕대군에게 입적돼 봉사손이 됐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에 연루돼 강화도로 귀양 가고, 그 해 10월 19일 그 일가가 멸문 당하면서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봉사손에서 제외됐다. 이 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인 성녕대군의 아내 성씨 또한 연좌돼 경주로 유배됐다. 이후 1456년(세조 2년) 7월 7일 세조의 명으로 석방됐다.
1459년(세조 4년),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했다.
덕양구 대자동(大慈洞)이란 이름은 조선조 태종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성녕대군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자 큰 자비를 비는 뜻에서 대자사(大慈祠)라는 절을 지었고, 이 절이 있는 곳이라 하여 대자동으로 부르게 됐다. 대부분 농촌마을이며 덕양대로, 통일로가 지나 교통이 편리하고 마을 앞으로 공릉천이 흐른다.
대자동에는 최영, 성령대군, 연산군 금표비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역사 탐방기사 잘 봤어요 대자동 내력도 알게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