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서오릉 제향봉행’ 현장을 가다

 

이철수 회장을 중심으로 사진 오른쪽이 초헌관 이봉기 양녕대군파장평정종중회장, 왼쪽 첫번째가 아헌관 민대홍 부원군댁 여흥민씨대종회 부회장, 그 옆이 종헌관 김지욱 경주김씨 경은부원군. 참석 내빈은 양녕대군파 21대 봉사손 이정원, 양녕대군파 이갑용 회장 등이다. 사진=김현채
명릉제향의 봉행과정을 담았다, 사진제공= 이철수 회장
명릉제향 참관 현장
[ 공동취재=이애순. 김현채 기자]
의친왕가 황손 이준(왼쪽), 이철수 회장 부부(오른쪽).
올해 월별제향일정표와 제향절차. 자료=전주이씨대동종약원 발행본

올해  명릉제례가 13일 서오릉에서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종중(봉향회장 이철수) 주관으로 거행됐다. 명릉제향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국가유산청 궁릉유적본부가 지원하는 제례다.

서오릉은 조선왕실 왕릉군으로, 명릉(明陵),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홍릉(弘陵) 등 다섯 능을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600년 동안 제례가 이어지고 있는 살아있는 한국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 중 하나다.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제향은 재실에서 봉등을 앞세우고 알자가 향축함을 받쳐 들고 출발했다. 이어 초헌관 등 삼헌관과 모든 제관들이 홍살문으로 향했다.

홍살문은 신과 인간의 경계로, 홍살문 안에서 전향축례를 시작했다. 이어 방단에서 제향이 시작됐다. 유수공파의 민대홍 부회장이 아헌관으로 임명돼 축례에 참반했다. 삼방파에서도 민경조 회장, 민동환 이사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전체 참석인원은 200여명이다.

해마다 제향 때마다 비가 내렸는데, 올해는 비가 오지 않았다. 이는 희빈 장씨가 시기해서 그런 것이니 고유제를 지내라는 대빈묘(옥산부대빈, 희빈장씨무덤) 회장의 말대로 7월 9일 명릉봉향회 임원들이 재배를 드리고 왔더니 올해 비가 오지않았다는 후문.

[역사 소고]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의 외아들로, 모후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다. 숙종은 무려 46년을 재위하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전국 토지를 조사하여 과세 면적을 넓히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상평통보를 발행하고 주전(鑄錢)을 확대해 조선후기 상업 발달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벌어진 처첩 갈등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모든 사건들은 궁궐에서 숙종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의 과정이었다. 또한, 모든 권력은 숙종에게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숙종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왕조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숙종이라는 시호를 소설의 제목으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숙종은 직접적인 당사자였다. 인경왕후가 승하하고 인현왕후를 들였으며, 종사를 잇기 위해 장희빈을 들였다. 장희빈이 악행을 저지르고 박태보 등이 간언했지만 숙종은 박태보를 귀양보냈으며, 장희빈의 모해로 인해 인현왕후가 폐위됐다.

이후 숙종은 홀로 밤을 보내다 숙빈 최씨를 만났으며, 장희빈이 숙빈 최씨를 가뒀지만 이때는 이미 숙빈 최씨가 영조를 잉태한 이후였다. 인현왕후를 폐비로 만들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박태보를 귀양보낸 것은 모두 숙종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22世) 민씨의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입암공(16世)이 6대다.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따님이다.

1681년(숙종7년) 가례(嘉禮)를 올리시고 15세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됐으나, 붕당정치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기사환국으로 인해 폐서인됐다가 갑신환국으로 복위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궁중에서 벌어진 권선징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숙종 시대의 영의정이었던 민암은 여흥 민씨 돈녕군파에 속한 가문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민암은 1636년에 태어나 숙종 초기에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당시 남인의 주요 인사 중 하나였다.

특히 돈녕군파는 조선 후기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민암은 탁남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서인과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 때 서인들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민암과 남인들은 크게 몰락하게 됐다.

민암은 결국 서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어 사사됐다. 당시 숙종 시대의 정치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치열했는데, 민암은 그 중심에서 권력 투쟁을 벌이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무튼 숙종대왕은 정치적 갈등 속에서 그 해결 방법을 당시의 여흥민씨 삼방파와 돈녕군파간의 동문간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재촉함으로써 정치적 변동과 붕당 간의 갈등을 잘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으며, 조선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인현왕후가 인내와 희생으로 모든 것을 감내한 ‘착한 여인’의 표상(表象)으로, 예의가 바르시고 덕성(德性)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推仰)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면에서 양파간의 대립이 아닌 화합의 장을 상보(相補)의 원칙 아래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고 보여진다. 숙종대왕도 이를 거울삼아 단종을 복권시켰다.

자문=봉향회 황포 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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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채 기자
김현채 기자http://blog.naver.com/pwrs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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