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량망우공간, 2022년 4월 1일 망우역사문화공원 전시·교육·홍보를 목적으로 신축됨. 기획전시실, 카페, 전망대 등이 있다. 사진=우성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서울 동서남북에 만들었던 공동묘지의 터가 부족해지자 1933년 추가로 조성한 ‘망우리공동묘지’가 변한 이름이다. 망우리 일대 52만 여 평에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가 40년 동안 묘지 4만7700여기로 가득차 포화상태가 돼 1973년부터 추가 매장을 종료했다.

매장 종료 후 도로 개설, 묘역 정비를 실시했고, 이장과 무연고 묘 정리를 통해 지금은 7000여기만 남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민둥산에 나무가 자라 울창한 숲이 됐다. 이제는 죽은 조상들의 안식터에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운동과 산책, 여가를 즐기는 살아있는 시민들의 힐링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의 공동묘지 역사

조선총독부는 1912년 6월 20일 묘지 설치를 허가제로 하는 ‘묘지규칙’을 공포했다. 1920년 전후로 미아리, 신당리, 신사리(은평구), 수철리(금호동), 아현리, 여의도, 이태원, 홍제내리 등 19개소 부립공동묘지를 허가했다. 세월이 지나며 묘역이 채워지고 주변환경의 개발로 차례로 폐장했다.

1933년 이태원, 수철리, 신사리, 홍제내리, 미아리(1,2) 묘원이 가득 채워진 뒤 주변 환경 변화로 폐장했다. 경기도로부터 75만평을 매수해 그 중 52만평을 묘지로 사용하는 망우리공동묘지를 개장했다.

유관순 열사 등이 합장된 합장묘와 합장표지비. 사진=우성윤
노고산묘골취장비. 1938년 무연분묘를 수습, 화장해 합장 이전했다. 사진=우성윤

1936년 이태원묘지에서 유관순, 나도향 등 무연분묘 2만8000여기를 화장 후 망우리묘지로 옮겨 합장묘를 만들고 합장비를 세웠다. 1938년 마포 노고산묘지 무연분묘를 ‘노고산묘골취장비’를 세우고 합장 이전했다. 1958년 미아리묘지 폐장 때 최학송, 박희도의 묘를 이장했다.

망우리공동묘지의 변화

1933년 5월 개장된 망우리공동묘지도 4만7700여기 묘로 가득차자 1973년 5월 매장을 종료했다. 사진=우성윤 인내판 캡쳐

서울시는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 ▲ 1977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 변경 ▲ 1997년부터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15명의 무덤 주변에 추모비 건립 ▲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 변경.
▲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 조성. ▲ 2022년 4월 1일 전시·교육·홍보의 중추역할을 할 중랑망우공간 개관

소파 방정환묘, 사진=우성윤
만해 한용운과 부인유씨 묘. 사진=우성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사이토오토사쿠 묘. 사진=우상윤

망우리공원에 묻힌 인물들

▲ 독립운동가 오세창, 문일평, 오기만, 서광조, 서동일, 오재영, 유상규, 유관순, 한용운, 안창호. 안창호 묘는 도산공원으로 이장돼 가묘만 남아 있다. 안창호가 자신을 망우리공원에 있는 유상규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가묘로 보존하고 있다.
▲ 시인·화가·소설가 박인환, 이중섭(유해는 절반만 매장돼 있으며, 나머지 절반은 일본의 처가묘에 합장됐다). 계용묵, 소파 방정환, 조각가 전진규, 가수 차중락
▲ 사회인사 지석영(종두법으로 전염병 퇴치), 장덕수, 조봉암(좌우합작), 김말봉(최초의 여성 예술원 회원)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도예학자 아사카와 다쿠미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친히 답사하고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을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했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올라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고 경탄한데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찾아가는 길

상봉역(7호선) 5번출구, 망우역(경의중앙선) 1번출구로 나와 구리 방면 201, 202, 165, 165-1, 65번 버스를 타고 ‘망우리공원’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서울 방향 고갯길로 올라가면 망우리공원 입구다. 구리방면에서 올 경우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m 쯤 걷다 오른편 녹지대 사이에 난 계단으로 올라가 낙이망우교를 건너면 망우리공원 입구를 만난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산책코스

공원 탐방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