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형으로 고난한 삶을 살았던 월산대군 묘와 신도비

월산대군 이정(李婷1454~1488)의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덕중(추존)의 장남이고 조선 제9대 성종의 친형이다. 일찍이 월산군(月山君)에 봉해지고 1468년(세조 14) 현록대부, 1471년(성종 2) 대군에 진봉(進封)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됐다.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는 자기 집 뒤뜰에 풍월정을 지어 시주(詩酒)와 서책을 즐기며 풍류적인 생활을 했고, 고양의 북촌에도 별장을 두어 자연과 벗하며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효문(孝文),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다.

묘비는 운문(雲文)이 조각된 비두(碑頭)와 장방형의 대석을 갖췄고,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 의 규모이며, 상석은 3매의 장판석을 놓았는데 정면 270cm, 측면 155cm다.

큼직한 봉관 앞에 묘비·상석·장명등, 그 좌우에 망주석·문인석과 신도비 등의 조선전기 석조물적 가치가 높고 승평부부인 박씨와의 봉분도 상·하로 자리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로 조선시대 묘제(墓制)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월산대군 신도비와 비각. 사진=우성윤.

신도비는 90cm 높이 이수(螭首)와 장방향의 비좌를 갖췄는데, 『월산대군비명』 이라 전자(篆字)한 비신은 높이가 281cm, 폭 94cm, 두께 32cm 규모다. 신도비명은 임사홍이 지었다고 하는데,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되어 현재의 비각을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사후에 왕세자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과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성종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성종의 즉위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월산대군은 왕위를 놓치고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자,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

월산대군은 주어진 명예와 부에 안주하고 있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조심하고 또 자제하려 애를 썼다. 정치 문제 등의 국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던 연회석에서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주정을 한 적이 없었다.

왕실·종친과 관련된 송사에서도 원칙과 명분에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해 종종 약자의 입장인 민간의 편을 들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나 가까운 친척, 그리고 집안의 종까지 엄하게 단속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덕수궁 석어당.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불에타 없어져 환도한 선조가 정릉동행궁으로 사용 했다. 사진=우성윤

월산대군의 생모 한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궁궐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세자로 책봉된 해양대군(훗날 예종)에게 동궁을 내주고 경복궁을 나와야 했다. 갑작스럽게 궁궐을 나가게 된 모자를 위해 세조가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죽은 세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그 옆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후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하고,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계속했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仁粹王后: 뒤에 소혜왕후로 추존)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다.

1489년(성종 20) 3월2일 친동생인 성종은 극진한 예를 갖춰 형의 별장이 있었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1리 견달산 정좌에 안장했다.

우성윤 기자
우성윤 기자
현재 고양시니어신문 기자, 숲해설가와 문화해설가(궁궐해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은행에서 30년 근무 했고, 전쟁기념관 도슨트, 성남문화해설사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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