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마을 바로 뒤편 언덕에 ‘의기강아묘'(義妓江娥墓)가 있다. 정철이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사랑했던 남원의 기생 자미(紫薇)의 묘다. 강아는 정철이 자미를 사랑하자 사람들이 송강의 강(江)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강아는 송강이 1591년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갔다. 하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철이 전라도와 충청도 도체찰사로 임명되며 길이 엇갈리게 된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왜군에게 붙잡히자 적장을 유혹하고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해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평양 탈환의 공을 세웠다.
이후 승려가 된 강아는 정철이 죽자 묘소를 지키며 여생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했다. 송강이 아끼던 기생 강아의 묘는 송강의 묘가 진천으로 천묘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문중은 제사 때 강아의 묘에 물림 상으로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 3, 강아의 사랑’에 나오는 강아 이야기 요약이다.
송강과 강아의 사랑 ‘영자미화(詠紫薇花)’
一園春色紫薇花(일원춘색자미화)/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누상망)/ 滿街爭是戀芳華(만가쟁시연방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니/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의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정철(鄭澈)이 ‘강아’를 위해 지은 한시 ‘영자미화(詠紫薇花)’ 즉, ‘자미화를 노래함’이란 한시다. 자미화는 100일 동안이나 핀다는 배롱나무꽃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의 본관은 영일이며. 자는 계함 호는 송강(松江)으로,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누이 중에는 인종의 후궁과 종친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있어 궁궐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명종 즉위 후 발생한 을사사화에 계림군을 비롯해 부친과 형이 연루되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위축됐고, 전라도 창평(담양군 창평면)으로 낙향해 약 10여 년을 지내기도 했다.
송강 정철은 천재적인 시인으로 가사문학의 대가로 시조 75수와 사설시조인 장진주사 1수, 그리고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등 가사 4편, 산문 427편이나 되는 걸작을 남겼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은 송강 정철이 부모의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다. 그리고, 1593년 귀양지 강화도 승정촌에서 향년 58세로 죽어 묻힌다. 주변에 부·모·장자와 큰형 내외의 묘가 있다. 정철의 묘소는 1665년(현종 6년) 우암 송시열의 권유로 후손에 의해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지장산)로 이장됐다. 고양의 초장지에는 ‘송강정철선생초장지’란 표시석이 있다.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이지만 광주이씨인 이발과 정치적 악연으로 광주이씨가 약 1천명 죽임을 당하게 한 기축옥사의 당사자로 이때부터 호남의 인재가 씨가 말랐다고 한 글을 읽었다.항시 좋은글 올려주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