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서원은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승리로 이끈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 1537∼159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1842년(헌종 8) 왕명에 의해 기공사(紀功祠)라는 명칭으로 건립됐고, 1843년에 사액을 받았다.
서원이 건립될 당시에는 외삼문을 ‘행주서원(幸州書院)’, 사당을 ‘기공사(紀功祠)’라 이름 지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의 서원과 사(祠) 중의 하나다. 이후 행주서원으로 발전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1970년대에 권율 장군의 사당을 다른 장소인 행주산성 내에 복원하고 위폐를 갖춘 뒤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를 옮겨 ‘충장사(忠莊祠)’라 이름 지었다. 1980년대 들어 정부와 후손들이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복원작업을 추진했고, 1988년에는 강당을, 1997년에는 사당을 복원해 원래대로 ‘기공사’라 이름 붙였다. 1998년 내삼문과 담장을, 이듬해 재실(齋室)을 완공하여 옛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충장사가 건립돼 제사기능이 충장사로 옮겨진 후 행주서원은 제사기능을 잃었다. 그래서 지금은 행주서원 옛터라는 의미로 ‘행주서원지(幸州書院址)’라고 부른다. 행주서원지(幸州書院址)는 1985년 9월 20일에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행주대첩비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1537∼1599)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장군의 부하들이 세운 비석이다.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됐다.
덕양산 정상에 있는 구비는 받침돌이 땅에 묻히고, 비몸이 어깨부분에서 밑부분까지 금이 가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선조 35년(1602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최립이 짓고 한호가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이 비의 명칭을 썼다. 비의 뒷면은 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썼다.
중건비는 구비가 너무 훼손·마모돼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비의 뒷면에 조인영이 일부 내용을 추가해 비문을 짓고, 이유원이 글씨를 썼다. 중건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1970년 주추만 남아 있는 기공사를 대신해 행주산성 안에 새로 지은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 옆으로 옮겨놓았다가 행주서원지가 복원된 이후, 2011년 3월 행주서원 내 원자리로 이건했다.
정상에 있는 15.2m의 행주대첩비는 1970년 건립한 것으로 탑신의 글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아래 비문은 신석호가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썼다. 이 비는 1963년 경기도민과 각계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기념비로 1970년대 행주산성보수정화사업에 의해 재건됐다.